Odds and Ends/art

[미술] 방구석 미술관 - 7. 폴 고갱, 야만인의 붓끝으로 그린 질문

개발자하소서 2025. 7. 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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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고갱 -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 증권맨에서 화가로: 두 세계 사이에서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처음부터 화가였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한때 잘나가는 증권 중개인이자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덴마크 출신 여성 메트 가드와 결혼한 후 안정된 삶을 살던 그는,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를 미술의 세계로 이끈 인물은 귀스타브 아로사라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사진가였죠.

 

아로사는 고갱에게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를 소개했고,

 

그 인연으로 고갱은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세잔과 교류하며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점점 키워갑니다.

 

하지만 그 역시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겪을 갈등,


"가정을 위해 안정된 직장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내면의 열망을 따를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고뇌했습니다.

 

31살의 고갱이 그린 <파리 카르셀 거리, 화가의 가장> 은 ‘회사원과 화가’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의 내면을 투영합니다.

 

바쁜 도심 속 가족의 모습은 마치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해 애쓰는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느껴지죠.

 

 

<파리 카르셀 거리, 화가의 가장>

 

 

 


 

📉 퇴사, 그리고 인생의 추락

 

 

그런데, 1882년 프랑스에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고갱은 회사를 해고당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래, 이제 진짜 화가가 되어보자.”


그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고, 루앙으로 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생활고가 이어졌습니다.

 

참지 못한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덴마크로 돌아가 버렸고,

 

고갱은 그 뒤를 따라 덴마크에 갔지만 그곳에서도 벽보를 붙이거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 당시 고갱의 심정을 나타내는 그림인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  입니다.

 

이 시기의 고갱은 자신을 잃어가던 시기였습니다.

 

외롭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한 상황. 이 작품은 마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

 

 

 

 

 


 

🏞️ 퐁타방: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서

 

 

36살이 된 고갱은 화가로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습니다.

 

프랑스 북서부 시골 마을 퐁타방(Pont-Aven)으로 향한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색감과 주제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가 집중한 건 ‘원시성과 야생’. 도시 문명에서 멀어진 순수한 삶, 그것이 고갱이 추구하던 예술의 방향이었습니다.

 

그의 <예배 뒤의 환상> 이란 작품을 보면,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된 구조입니다. 

 

'예배’를 마친 농촌 여인들이 환영처럼 떠오르는 타락한 형상을 바라보는 장면.

 

이는 “순수한 사람만이 현실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다” 는 고갱의 철학을 담고 있죠.

 

 

<예배 뒤의 환상>

 

 


 

🌴 야만인을 자처하다

 

퐁타방 이후, 고갱은 더욱 더 ‘문명에서의 탈출’을 갈망합니다.


1887년, 남미 파나마의 작은 섬 타보가로 떠났지만

 

그곳은 이미 유럽인의 휴양지가 되어 있었고, 다시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식민화된 땅. 결국 그는 "나는 야만인이다" 라고 외치며 프랑스로 돌아오고,

 

예술 인생의 승부수타히티를 선택합니다.

 

 


 

💍 타히티에서의 결혼, 그리고 예술

 

타히티에서 그는 13살의 원주민 소녀와 결혼하고, 타히티의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그는 자신을 타히티 원주민의 일원처럼 표현하고자 했고, 이를 대표하는 그림이 바로...<마리아를 경배하며> 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 경배 장면을 타히티의 배경과 인물로 바꿔 그렸습니다.

 

고갱은 유럽 중심의 종교와 문명에 대한 풍자 혹은 융합을 시도한 것이죠.

 

그 속에는 “나도 이제 유럽인이 아니라 타히티 사람이다”라는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마리아를 경배하며>

 

 

 


 

🌌 걸작의 탄생

 

 

그는 말년에 자신의 철학을 집대성한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바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D'où venons-nous ? Que sommes-nous ? Où allons-nous ?"

 

 

고갱의 대표작이자 유언 같은 작품입니다.

 

거대한 캔버스에 원시적 존재, 탄생, 일상, 죽음이 이어지는 삶의 순환이 담겨 있으며,

 

한쪽에는 갓 태어난 아기가, 가운데는 과일을 따는 인물, 한쪽에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 그려져 있죠.

 

이는 인간의 탄생, 삶, 죽음을 3단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종교적이거나 예술적인 성찰이 아니라,


고갱 자신의 삶 전체를 요약하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고갱의 마지막

 

비로소 죽기 3년 전부터 작품이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심각한 매독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살 시도까지 했습니다.


1903년, 타히티 인근 마르키즈 제도에서 그는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야만인 화가’ 고갱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정리하며: 고갱이 남긴 메시지

 

고갱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도덕적으로도 비판받을 여지가 많은 인물이죠.


하지만 그는 “그림이란 나의 생존 방식이며, 세상을 향한 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고갱의 마지막 질문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의 답은, 아마도 당신의 삶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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